제4회 월례강좌(박정희의 기능공 양성과 중화학공업화 그리고 중산층 사회의 등장) ( 2016-04-14 17:00 )
- 학술
- 2020.01.17
제4회 월례강좌
박정희의 기능공 양성과 중화학공업화 그리고
중산층 사회의 등장
- 일시 : 2016년 4월 14일(수) 17:00
- 장소 : 박정희대통령기념관 2층 민족중흥실
- 연사 : 류석춘 연세대학교 사회학과 교수
- 연제 : 박정희의 기능공 양성과 중화학공업화 그리고 중산층 사회의 등장
박정희의 기능공 양성, 노동운동, 중산층 형성, 그리고 오늘날의 노동문제:1972년부터 지금까지
2016년 4월 14일, 박정희기념재단 류석춘(연세대 교수·사회학)
1970년대 박정희 대통령은 다양한 방법으로 수많은 숙련기능공을 양성하였다. 3년제 공업고등학교 혹은 짧으면 6개월에서 길면 2년 과정의 직업훈련원을 통해 배출된 기능공의 숫자는 중화학공업화를 선언한 1973년부터 박 대통령이 서거한 1979년까지 약 80만에서 100만 정도의 규모였다. 기능공 양성은 이후 전두환 체제에서도 이어져 1987년 ‘노동자대투쟁’이 벌어지기까지 같은 규모의 숙련기능공이 지속적으로 배출되었다. 두 시기를 합해 양성된 기능공은 대략 200만 정도의 대규모였다.
이들은 대부분 당시 최첨단 공장이 들어선 울산·마산·창원 지역에 취업했다. 이들은 모두 남성으로서 1960년대 경공업 분야의 여성 노동자와는 질이 다른 전혀 새로운 종류의 노동자 집단이었다. 이들은 기능올림픽에 출전해 메달을 딸 정도의 숙련을 가지고 있었으며, 지속적인 기술축적이 가능하도록 군 생활을 기술하사관(RNTC) 혹은 방위산업체 대체근무 등의 방식으로 마칠 수 있었다. 중동으로 진출해 건설이나 플란트 공사에 종사하며 달러를 벌어들인 분들도 바로 이들 숙련공이다.
당시 대학 운동권은 이들을 상대로 소규모 의식화 모임을 주도하고 또한 위장취업을 통해 노동현장을 장악해 나가며 마침내 1987년 ‘노동자대투쟁’이라고 불리는 사건을 일으켰다. 이후 10년간 즉 외환위기가 벌어진 1997년까지 이들은 사업장마다 우후죽순으로 노동조합을 만들어 한편으로는 체제를 부정하는 노동운동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당시 급성장하던 우리 경제를 배경으로 자신들의 임금과 복지 수준을 한껏 끌어 올렸다. 노동자의 중산층화는 이렇게 진행되었다. 200만 숙련노동자를 4인 가족으로 계산하하면 전체 800만의 중산층이 탄생한 셈이다.
그러나 1997년 외환위기는 이들에게 직격탄을 날렸다. 회사가 넘어가면서 불어 닥친 실업의 위기는 이들 숙련노동자들을 위협했다. 이때부터 노동조합은 조합을 구성하는 정규직의 해고를 막기 위해, 조합 바깥에 있는 비정규직을 방패막이로 활용하기 시작했다. 1998년 현대차 노조의 ‘36일 파업’이 이를 상징하는 사건이다. 이때부터 노조는 ‘내부노동시장’을 강화하며 귀족화되기 시작했고, 회사는 노조를 경계한 나머지 정규직 직원의 충원을 꺼리게 되었다. 비정규직의 대규모 양산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박정희 대통령이 만든 기술교육 시스템이 숙련을 가진 200만 노동자를 만들었다. 그리고 또한 이들을 오늘날 대기업으로 성장한 회사에 모두 취직시켰다. 이들이 80년대 후반 민주화 바람을 타며 전투적 노조를 만들어 임금상승을 주도했다. 오늘날 대기업 노조는 평균 연봉 8천만 원을 자랑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의 반대편에는 역사상 최고 수준의 실업률(15%)에 시달리는 청년집단이 존재한다. 또한 연봉 2천만 원을 채 받지 못하는 비정규직이 넘쳐나고 있다. 그럼에도 대기업 노조는 고용세습을 위한 단체협약을 포기하지 않고 있다. 노동시장의 유연화가 필요하다.